장애라는 혐오표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낸 김지혜 작가는 한 토론회에서 사용한 '선택 장애'라는 표현이 책을 쓰게 된 계기라 설명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한 청중이 찾아와 왜 선택 장애라는 단어를 사용했냐 물었고, 이에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점에 대해 부끄러워 책을 썼다는 것이다.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고, 혐오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애라는 단어 자체에 열등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사회를 진보시키고 차별을 방지하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선한 의도가 변질되지 않았으면 한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아 어떤 표현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지만 '장애'라는 단어만 가지고 말해보겠다.
앞서 나왔던 '선택장애'는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확실히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선택지가 많아짐과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결과다.
다른 표현으론 '기능장애'가 있다. 기계가 복잡해지면서 다양한 기능이 생겼고 그에 따른 고장이 빈번하게 생긴다. 고장의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어느 한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기능장애'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장애'라는 표현 말고 '고장'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느냐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기능 고장'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고장은 부품에 대한 표현이고 장애는 제품이 해야 할 역할(기능, 성능)을 못할 때 사용하므로 표현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위 두 단어를 놓고 보겠다. '기능장애'라는 단어에서도 혐오감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선택장애'라는 표현에는 혐오감과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스스로를 혐오하고 열등하게 느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본인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세상과 맞설 수 있겠는가?
이 투쟁의 시작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다. 타인이 의제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제를 던지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가 열등한 존재가 아니란 인식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개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존재 자체 존엄을 말해야 한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본인들이 원하는 환경이 조성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과거 참정권을 얻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던 하층민, 여성, 흑인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이 본인의 권리를 생각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자 못했다면 지금의 값진 성취는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장애인을 봤을 때 그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불편하겠구나'고 느낀다. 이 불편마저도 불편하게 느낀다면 더 이상의 논의는 의미 없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있다.
본인이 차이를 인지하고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시각 장애인을 예로 들면 다른 감각이 뛰어난 것은 둘째치고 시각 장애인만 볼 수 있는 세상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농아라면 농아만이 들을 수 있는 세상을 듣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열등감으로 인한 불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 사회 진출, 인권, 존엄을 외치는 투쟁을 한다면 기꺼이 그들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
P.S. 가스라이팅도 비슷한 접근법으로 보고 있다. 가스라이팅이 범죄라는 사실은 인지하겠지만 그 경계선이 모호하고 본인 마저도 가스라이팅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스라이팅을 멈춰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본인의 존재 가치를 높여 자존감을 키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지 범죄를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